에릭 로메르의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 사람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 순간부터 우리가 좋아하는 그 대상은 현실의 그가 아닌 우리 머릿속에서 이상화된 존재 그 자체이다. 이런 경향은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수록 심해지며, 현실의 그와 이상화된 그를 동일시하거나 혹은 그 둘이 다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혼란을 겪고 좌절하게 된다.
ㅇ 영화명: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L'Ami De Mon Amie)
ㅇ 감독: 에릭 로메르 (프랑스, Eric Rohmer)
ㅇ 제작연도:1987년
ㅇ 한줄평: '홍상수 영화의 원형을 보는 듯한 작품'
ㅇ 리뷰:
요즘 CGV에서 에릭 로메르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극장가는 다시 활력을 되찾는가 싶더니 추석 대목을 중심으로 잇달아 개봉했던 대작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흥행 성적표를 받은 이후 영화사들은 개봉 시기 조율을 위한 눈치싸움에 들어갔다.
그 사이 빈 스크린을 특별전, 흥행 영화 재개봉 등으로 옛 영화들로 채워지고 있다.
'홍상수 같은' 영화를 찍는 감독
에릭 로메르는 60년대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프랑스 감독으로,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프랑스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는 '홍상수 같은'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는 설명이 와닿았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잔잔하고 일상적인 드라마를 과장과 자극 없이 감각적으로 스크린에 담아낸다. 내가 본 그의 첫 영화는 <오후의 연정>이다. <오후의 연정>도 재미있게 봤지만 뭔가 좀 심심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톨스토이의 소설이나, 이광수의 <무정> 같은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답답함 같은 게 좀 있었다.
좋은 프랑스어 교재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도 <오후의 연정>과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가 좀 더 내 취향에 가까웠다. 영화 제목 때문인지 영화 초반에는 등장인물 중 누가 나고, 누가 내 여자친구고, 누가 그 남자친구인지 찾아 다니기 바빴다. 영화는 모든 장면이 나레이션이나 독백도 거의 없이 인물들간의 대화로 연결되어 있는데, 게다가 알아듣지 못하는 프랑스어가 흘러나오니, 자칫 지루하거나 딴 생각하기 좋았다. 마치 어학 공부할 때 듣는 대화녹음을 보는 듯 했지만 프랑스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마저도 좋은 프랑스어 교재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작은 미뢰 살아나는 기분
<오후의 연정>과 마찬가지로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도 다소 심심한 면이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지만) 초창기 홍상수 영화는 에릭 로메르 영화보다 좀 더 파격적인 면이 있고 그래서 좀 더 몰입감이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문득 든 생각은 그런 면에서 에릭 로메르나 홍상수의 영화 장점이 있지 않나 싶다. 프랑스인들은 아이들에게 케첩 같은 자극적인 소스를 잘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 소위 한 번 '매운맛'이라고 표현되는 '자극'에 노출되다 보면 모든 감각이 그 자극에 집중되고 결국 미묘한 감각은 어느새 무뎌지게 된다. 때리고 부쉬고 죽이고 큰 반전을 동반한 할리우드 블랙버스터 류의 영화만 보다 보니 어느새 미묘한 감정이 주는 잔잔한 파동에 대해서는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잔물결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를 보며 '아, 저런 감정도 있구나. 나도 저런 걸 느낌적이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고 작은 미뢰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이상화하는 경향
본 영화의 내용 중 특히 공감이 갔던 부분은 블랑쉬가 평소 관심이 있던 알렉상드르와의 관계가 생각처럼 풀리지 않을 때 좌절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 사람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 순간부터 우리가 좋아하는 그 대상은 현실의 그가 아닌 우리 머릿속에서 이상화된 존재 그 자체이다. 이런 경향은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수록 심해지며, 현실의 그와 이상화된 그를 동일시하거나 혹은 그 둘이 다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혼란을 겪고 좌절하게 된다.
프랑스 젊은이들의 라이프 스타일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에서 내 눈을 끄는 또 한 가지는 스타일이었다. 영상의 스타일이기도 하고, 영화가 보여주는 70~80년대 프랑스 젊은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이기도 하다. 등장인물들이 입은 옷, 주인공의 집 인테리어, 배경 건축물의 양식 등 원색 계열의 심플하면서도 깔끔한 디자인이 여름 느낌을 물씬 주면서 청량감까지 느껴졌다. 특히 레트로 감성인지 몰라도 등장인물의 옷이며 헤어스타일은 지금이라 세련되게 느껴질 정도였다. 또한 일정 부분 의도된 거겠지만 주인공들이 센 강변에서 수영을 하고 노는 장면은 마치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의 명화를 보는 듯했다. 마지막 장면의 친구끼리 오해를 하고 오해한 커플끼리 같은 색을 맞춰 입은 장면 역시 위트 있었다. 또한 8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부유하고 여유로운 프랑스인들의 라이프 스타일 역시 멋있으면서 부러웠다.
'감상이 있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술]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5) | 2023.03.28 |
---|---|
[미술]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14) | 2023.03.27 |
[미술] 쿠르트 슈비터스 Kurt Schwitters (14) | 2023.03.25 |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 : 사실 너도 똑같잖아 (0) | 2022.12.13 |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한계 효용 (0) | 2022.10.21 |